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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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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 강왕은 춘추 시대 초나라의 왕으로, 초 공왕의 뒤를 이어 기원전 559년부터 기원전 545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진나라, 오나라와의 갈등 속에서 정나라를 공격하거나 제나라를 지원하는 등 군사적 활동을 펼쳤다. 또한, 내부 권력 투쟁으로 인해 측근을 처형하는 사건도 있었다. 재위 15년 만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인 웅원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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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강왕
기본 정보
가문 이름미(羋)
씨족 이름웅(熊)
소(昭)
시호강왕(康王)
왕조
국가
통치 기간기원전 559년 – 기원전 545년
개인 정보
아버지공왕

2. 생애

초 공왕 때부터 초나라는 진(晉)나라와 패권을 다투었으나 우위를 점하지 못했고, 남쪽에서는 오나라와의 전쟁이 길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기원전 560년 공왕이 사망하자 강왕이 즉위했지만, 당시 초나라 안팎에서는 진(晉)나라와의 경쟁이 어렵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많았다.

즉위 초, 강왕은 오나라의 침입을 격퇴하고[3] 내정을 정비하려 했으나, 국제 정세는 여전히 불리하게 돌아갔다. 기원전 559년 진(晉)나라가 주도한 제후 연합군이 초나라의 동맹인 진(秦)을 공격했을 때 초나라는 이를 돕지 못했고, 오히려 오나라를 공격했다가 패배했다. 기원전 557년에는 진(晉)나라와의 담판(湛阪) 전투에서 패배하여[4] 국력의 약세를 드러냈다. 이 패배는 진(晉)-초 양강 구도의 종식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4][5]

진(晉)나라가 제후들을 동원해 제나라를 공격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는 동안에도 초나라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기원전 555년 강왕의 질책으로 마지못해 진(晉)나라를 따르는 정나라를 공격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발생했다. 기원전 551년에는 영윤 자남(子南)과 그의 총신 관기(觀起)를 사치와 권력 남용을 이유로 처형하는 사건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자남의 아들 기질(棄疾)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기원전 547년에는 대부 초거(椒擧)가 강왕의 시기를 피해 진(晉)나라로 망명했으며, 대부 채성자는 초나라의 가혹한 형벌과 인재 유출 문제를 지적하며 '초재진용(楚材晉用)'이라는 고사의 배경이 되는 발언을 남겼다.

오나라와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즉위 초 승리에도 불구하고 오나라의 침입은 계속되었고, 기원전 549년에는 오나라가 초나라의 속국인 서구(舒鳩)를 회유하려 했다. 기원전 548년 결국 서구가 배반하자 영윤 굴건이 이를 토벌하고 오나라 구원군을 격파했으며, 같은 해 오왕 주번이 직접 침공해왔으나 초나라 장수에게 사살되었다. 이후에도 초나라는 오나라와 크고 작은 충돌을 이어갔다.

기원전 546년, 초나라는 송나라에서 열린 제후 회맹(미병)에 참여하여 진(晉)나라와의 오랜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움직임에 동참했다.

기원전 545년 겨울, 강왕은 재위 15년 만에 사망했다.[2] 그의 사후 아들 가오가 잠시 왕위를 이었으나, 곧 강왕의 동생인 공자 위에게 살해당하고 왕위를 찬탈당하는 등[2] 초나라는 극심한 왕위 계승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아버지 초 공왕 대부터 초나라는 진(晉)과 패권을 다투었으나 우위를 점하지 못했고, 남쪽에서는 나라와의 전쟁이 길어지며 국력이 소모되고 있었다. 기원전 562년에는 진(晉)나라가 초나라와 가까웠던 정나라를 끌어들여 동맹을 맺으면서 초나라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기원전 560년 9월, 공왕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인 강왕이 즉위했다. 즉위 당시 정나라의 대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초나라가 더 이상 진(晉)나라와 경쟁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국내외 상황은 비관적이었다. 즉위 직후 나라가 침입해왔으나, 사마(司馬) 공자 오(자경)가 옹포에서 이를 격퇴했다.

강왕 원년(기원전 559년), 진(晉)나라는 제, 송, 노, 위 등 여러 제후국 군대를 연합하여 진(秦)을 토벌했다. 이는 과거 진(秦)나라가 초나라와 동맹하여 정나라를 도왔던 것에 대한 보복 성격이었으나, 당시 초나라는 진(秦)나라를 돕지 못하고 오나라와의 전쟁에 발이 묶여 있었다. 오히려 공자 정(자낭)이 이끈 오나라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강왕 2년(기원전 558년), 강왕은 주요 관직을 새로 임명하며 내정을 정비했다.

직위인물
영윤공자 오 (자경)
우윤공자 파융
대사마위자풍
우사마공자 단사
좌사마공자 성
막오굴도
잠윤공자 추서 (자남)
연윤굴탕
궁구윤양유기



강왕 3년(기원전 557년), 새로 즉위한 진 평공이 이끄는 진(晉)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침공했다. 공자 격이 군대를 이끌고 맞섰으나 담판(湛阪)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초나라의 군사적 약세가 명확히 드러났다.

강왕 5년(기원전 555년), 진(晉)나라가 제후 연합군을 이끌고 강국인 제나라를 공격했다. 이는 초나라에게 진(秦)과 제나라라는 두 강대국과 협력할 기회를 주었지만, 초나라 영윤은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강왕은 즉위 후 5년 동안 군사를 내보내지 않아 선왕의 업적을 훼손하고 있다며 영윤을 질책했다. 이에 영윤은 군대를 동원하여 진(晉)나라를 따르는 정나라를 공격하여 수도를 포위했으나, 정나라는 굴복하지 않았고 결국 이듬해 진(晉)나라가 다시 제나라를 공격하여 강화를 맺게 되면서 초나라의 군사 행동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강왕 9년(기원전 551년), 영윤 자남(子南, 공자 추서)의 총애를 받던 관기(觀起)라는 인물이 자신의 지위에 맞지 않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여 문제가 되었다. 강왕은 자남의 권세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국가 기강을 위해 이들을 처벌하고자 했다. 강왕은 자남의 아들이자 자신의 어사(御士)인 기질(棄疾)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고, 기질은 아버지의 일이라도 군주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답했다. 결국 강왕은 조정에서 자남을 살해하고 관기는 수레 여러 대에 묶어 찢어 죽이는 환형(轘刑)에 처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연루된 기질은 장례를 치른 후, 아버지를 배신하고 원수인 왕을 계속 섬길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외에도 즉위 초반에는 주변국의 정세 불안으로 망명자들이 초나라로 들어오는 경우가 잦았다. 기원전 554년에는 정나라의 자혁과 자량이, 기원전 553년에는 채나라의 공자 리와 진(陳)나라 애공의 동생 황이, 기원전 552년에는 진(晉)나라의 란영이 초나라로 망명해 왔다. 같은 해 영윤 공자 오가 사망하여 위자풍이 후임 영윤이 되었다.

2. 2. 진나라와의 갈등

공왕 때부터 진(晉)나라와 패권을 다투었으나 우위를 점하지 못했고, 오(吳)나라와의 전쟁이 길어지며 국력이 소모되었다. 기원전 562년 진나라가 초나라와 가까웠던 정나라를 끌어들여 동맹을 맺자 공왕은 대응하기 어려웠다. 기원전 560년 공왕이 죽고 강왕이 즉위할 무렵에는 정나라 대부와 초나라 사람들조차 초나라가 더 이상 진나라와 경쟁하기 어렵다고 여겼다.

기원전 559년, 강왕 원년에 진나라는 제, 송, 노, 위 등 여러 제후국 군대를 연합하여 진(秦)나라를 공격했다. 이는 과거 진(晉)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여 동맹을 맺을 당시, 초나라와 친했던 진(秦)나라가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진(晉)나라를 공격하여 역(櫟)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대한 보복 성격이었다. 진(晉) 연합군은 진(秦)나라 영토 깊숙이 진격하여 경수(涇水)를 건너려 했으나, 진(秦)나라 사람들이 경수에 독을 풀어 진군을 지체시키는 등 완강히 저항하여 굴복시키지 못했다. 당시 초나라는 진(秦)나라를 지원하지 못하고 오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기원전 557년, 진나라 평공(平公) 즉위 원년에 진(晉)나라는 다시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공격했다. 담판(湛阪) 전투[4] (현재 허난성 핑딩산시 부근)에서 초나라는 또다시 패배했고, 이로써 초나라의 국력이 진나라보다 약해졌음이 명백해졌다. 이 전투는 약 80년간 이어진 진(晉)-초 경쟁 시대의 사실상 종식을 알리는 사건이었으며,[4] 초나라는 이 패배로 만리장성의 일부인 방성(方城) 북쪽 영토를 모두 잃었다.[4] 이후 쇠약해진 초나라는 새롭게 부상한 강적인 오나라와의 전쟁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기원전 506년 백거 전투에서 수도 영(郢)이 함락되는 비극을 맞는다.[5]

기원전 555년, 진나라는 다시 정, 송, 노, 위 등 제후국 군대를 동원하여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후 연합군은 제나라 수도를 포위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 강왕 즉위 후 진(晉)나라는 초나라의 동맹국인 진(秦)나라를 공격하고, 이번에는 강국인 제나라까지 공격하여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이는 초나라가 진(秦), 제나라와 연대할 가능성을 열었으나, 초나라는 즉각적인 군사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강왕은 영윤에게 즉위 5년 동안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 선왕의 업적을 저버리고 있다고 질책했다. 이에 영윤은 군대를 동원하여 진나라를 따르는 정나라를 공격하여 수도를 포위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제나라를 지원하는 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정나라는 굴복하지 않았고, 진나라는 기원전 554년 다시 제나라를 공격하여 결국 강화를 맺었다. 초나라의 군사 행동은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기원전 547년, 초나라 대부 초거(椒擧)가 강왕의 시기를 받아 진나라로 망명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초나라로 돌아온 대부 채성자는 영윤 자목(子木)에게 "지금 초나라는 형벌이 가혹하고 정치가 혼란하여 대부들이 사방으로 달아나고 있습니다. 이들이 다른 나라로 가 초나라에 해를 끼친다면 국가의 병폐를 고치기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지적했다. 이는 훗날 '초재진용(楚材晉用, 초나라 인재를 진나라에서 쓴다)'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었다. 이는 진나라와의 경쟁에서 초나라가 인재 유출이라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546년, 영윤 굴건이 송나라로 파견되어 진나라의 조무, 노나라의 숙손표, 채나라의 공손귀생 등 여러 제후국 대표들과 회담(미병)을 가졌다. 이는 오랜 기간 지속된 진(晉)-초 간의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움직임의 일환이었다.

이처럼 강왕 시대 초나라는 진(晉)나라와의 패권 경쟁에서 점차 밀려나는 모습을 보였다. 담판 전투의 패배는 결정적이었으며, 이후 초나라는 내부 문제와 오나라의 부상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반면, 패권을 유지하던 진(晉)나라도 점차 내부 분열이 심화되어 훗날 삼진(三晉)(한, 조, 위)으로 분열되는 길을 걷게 된다.[5]

2. 3. 오나라와의 갈등

아버지 공왕이 기원전 560년에 사망하자, 초나라의 오랜 경쟁 상대였던 진나라와의 패권 다툼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위협인 오나라와의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공왕의 사망을 틈타 오나라는 초나라를 침략할 기회를 노렸다.[3]

기원전 560년 9월, 강왕이 즉위하자마자 오나라가 침입해왔다. 초나라 군사령관 사마 자경(子庚)과 장군 양유기는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의 침략군을 격퇴했다. 초기 전투 후 자경은 일부러 패배한 척하며 후퇴했고, 오군은 퇴각하는 초군을 융포(庸浦, 현재의 안휘성 우웨이시)까지 추격했다. 그러나 이는 초나라의 함정이었고, 매복에 걸린 오군은 크게 패배했으며 오나라 사령관 당(黨)은 포로로 잡혔다.[3]

그러나 이듬해인 기원전 559년(강왕 1년), 초나라의 공자 정(자낭)이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패배하고 말았다.

기원전 549년(강왕 11년), 진 평공이 초나라의 동맹국인 제나라를 공격하자, 초나라는 진나라의 동맹국인 정나라를 공격하여 제나라를 도우려 했다. 오왕 주번(諸樊)은 이 기회를 틈타 초나라의 속국인 서구(舒鳩, 현재의 안후이성 수청현)를 회유하여 오나라 편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강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침공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철수해야 했다.

기원전 548년(강왕 12년), 결국 서구가 초나라를 배반하자, 새로 영윤이 된 굴건(屈建, 자목)과 장군 자강(子彊)이 군대를 이끌고 서구를 토벌했다. 이때 서구를 구원하러 온 오나라 군대를 다시 한번 매복 작전으로 격파하고 서구를 초나라에 병합했다.[6][7] 같은 해 12월, 오왕 주번은 서구에서의 패배에 굴하지 않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다시 초나라를 침략하여 소성(巢城)을 공격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초나라 장수 우신(牛臣)은 성문을 활짝 열어 오군을 유인한 뒤, 성 안으로 들어온 주번을 화살로 쏘아 죽였다. 왕을 잃은 오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져 또다시 패배했고, 주번의 동생 여제(餘祭)가 오나라 왕위를 이었다.

기원전 547년(강왕 13년) 여름, 강왕은 진나라 군대와 함께 오나라를 침공하여 우루(雩婁)까지 진격했지만, 오나라의 방비가 견고하여 별다른 소득 없이 철수했다.

이처럼 강왕 시대 초나라는 진나라와의 경쟁에서 밀리는 와중에 새롭게 부상한 오나라의 계속된 침략과 도발에 맞서 싸워야 했으며, 양면 전선의 부담 속에서 국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이는 이후 백거 전투에서 오나라에게 수도 잉이 함락되는 비극의 전조가 되었다.[5]

2. 4. 내부 권력 투쟁

기원전 551년, 초나라영윤 자남(子南)이 총애하던 신하 관기(觀起)는 아직 높은 지위에 오르지 않았음에도 수십 필의 말을 소유하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이를 지켜본 초 강왕은 국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자남과 관기를 처벌하기로 결심했다.

강왕은 자남의 아들이자 자신의 어사(御士)였던 기질(棄疾)에게 속마음을 떠보았다. 강왕이 기질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자, 기질이 그 이유를 물었다. 강왕은 "영윤(자남)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국가를 위해 벌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자네의 입장이 있지 않은가?"라고 답했다. 기질은 아버지와 군주 사이에서 고뇌했지만, 신하로서의 도리를 지키겠다며 왕의 뜻을 따르기로 약속하고 비밀을 지켰다.

얼마 후, 강왕은 조정에서 자남을 살해하고 관기는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이는 환형(轘刑)에 처한 뒤 시신을 전시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사흘째 되던 날, 기질은 강왕에게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강왕은 이를 허락했다. 장례를 마친 후, 기질을 따르던 이가 앞으로 어찌할 것인지 물었다. 기질은 "나는 내 아버지를 죽이는 일에 연루되었다. 임금은 나의 원수이다. 더는 참을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은 강왕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내부 갈등을 보여준다.

기원전 547년, 초나라의 대부 초거(椒擧)는 강왕의 시기를 받아 진나라로 망명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무렵 초나라로 돌아온 대부 채성자(蔡聲子)는 영윤 자목(子木)과의 대화에서 당시 초나라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지금 초나라는 형벌이 음란하고 추잡하며 많아, 그 대부들이 사방으로 달아나 죽게 되었는데, 이를 위하여 임금을 도모하여 초나라에 해를 입힌다면 국가의 병을 치료할 수 없을 것이오."라고 지적했다. 이는 '초재진용(楚材晉用)', 즉 초나라의 인재가 진나라에서 쓰인다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었으며, 당시 초나라의 불안정한 내부 상황과 인재 유출 문제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2. 5. 죽음과 계승

기원전 547년, 초나라 대부 초거(椒擧)가 강왕의 시기를 받자 분노하여 진나라로 달아났다. 이후 초나라 대부 채성자(蔡聲子)가 초나라로 돌아와 당시 영윤이던 자목(子木)과 만나 초나라의 혼란한 정치 상황, 특히 형벌 남용과 인재 유출 문제를 지적하며 "지금 초나라는 음란하고 추잡한 형벌이 많아, 그 대부가 사방으로 달아나 죽게 되었는데, 이를 위하여 임금을 도모하여 초나라에 해를 입힌다면 국가의 병을 치료할 수 없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는 훗날 '초나라 인재를 진나라가 쓴다'는 의미의 《초재진용(楚材晉用)》이라는 고사의 배경이 되었다.

기원전 545년 겨울, 강왕은 재위 15년 만에 사망했다.[2]

강왕은 초 공왕의 다섯 아들 중 장남이었으며, 공왕의 아들 중 네 명이 왕위에 오르는 복잡한 계승 구도를 예고했다. 강왕이 죽자 그의 아들인 웅원(시호 가오)이 왕위를 계승했고, 강왕의 동생인 공자 위(公子圍, 훗날의 초 영왕)가 영윤이 되었다.[2]

그러나 4년 뒤인 기원전 541년, 영윤이던 공자 위는 조카인 가오와 그의 두 아들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초 영왕이다.[2]

영왕의 찬탈 이후에도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은 계속되었다. 기원전 529년, 영왕이 허나라를 정벌하러 간 사이, 그의 세 동생인 공자 비(公子比), 공자 자석(公子子皙, 자계), 공자 기질(公子棄疾, 웅기지)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왕의 아들인 태자 록(太子祿, 율)을 살해했다. 공자 비가 왕위에 올라 자오가 되었고, 공자 자석(자계)이 영윤이 되었다. 쿠데타 소식을 들은 영왕의 군대는 흩어졌고, 영왕은 결국 자살했다.[2]

하지만 다섯째 동생인 공자 기질(웅기지)은 영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영왕이 패배한 척하며 곧 돌아올 것이라고 자오와 자계를 속였다. 이에 겁을 먹은 자오와 자계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오는 왕이 된 지 20일도 채 되지 못했다. 이후 공자 기질이 왕위에 올라 초 평왕이 되었다.[2]

3. 대신(大臣)


  • 기원전 558년, 공자 오(午)가 영윤에, 공자 피융(罷戎)이 우윤(右尹)에, 위자빙(蔿子馮)이 대사마(大司馬)에, 공자 탁사(橐師)가 우사마(右司馬)에, 공자 성(成)이 좌사마(左司馬)에, 굴도(屈到)가 막오(莫敖)에, 공자 추서(追舒)가 잠윤(箴尹)에, 굴탕(屈荡)이 연윤(連尹)에, 양유기(養由基)가 궁구윤(宫厩尹)에 임명되었다.
  • 기원전 552년, 영윤 공자 오가 죽자 위자빙에게 영윤직을 제안했으나 거절하여 자남(子南)이 영윤이 되었다.
  • 기원전 551년, 강왕은 자남을 죽이고 위자빙을 영윤으로, 공자 기(齮)를 사마(司馬)로 삼았다. 굴건(屈建)은 막오(莫敖)가 되었다.
  • 기원전 548년, 영윤 위자빙이 죽자 굴건이 영윤이 되었고, 굴탕이 막오(莫敖)가 되었다.

4. 가계도

초 강왕은 초 공왕의 다섯 아들 중 맏아들이었다.[2] 공왕의 아들 중 강왕을 포함하여 네 명이 왕위에 올랐다. 강왕에게는 네 명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둘째는 위공자(훗날 초 영왕), 셋째는 웅비(훗날 자오), 넷째는 자계공자, 다섯째는 웅기지(훗날 초 평왕)였다.[2]

강왕에게는 아들 웅원(시호 가오)이 있었으며, 강왕이 기원전 545년에 사망하자 가오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때 강왕의 동생인 위공자가 재상으로 있었다.[2] 그러나 4년 뒤인 기원전 541년, 위공자는 병을 핑계로 정변을 일으켜 조카인 가오와 그의 두 아들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초 영왕이 되었다.[2]

기원전 529년, 영왕이 허나라를 정벌하러 간 사이, 그의 세 동생인 웅비(자오), 자계공자, 웅기지(초 평왕)가 쿠데타를 일으켜 수도를 장악하고 영왕의 아들인 태자 율을 살해했다. 셋째 웅비가 왕위에 올라 자오가 되었고, 넷째 자계공자가 재상이 되었다. 쿠데타 소식이 전해지자 영왕의 군대는 흩어졌고, 영왕은 절망 속에서 자살했다.[2]

그러나 막내 동생 웅기지(초 평왕)는 영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오히려 영왕에게 패배한 척하며 곧 돌아올 것이라고 자오와 자계공자를 속였다. 두려움에 빠진 자오와 자계공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오는 왕이 된 지 20일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후 웅기지가 왕위에 올라 초 평왕이 되었다.[2] 초 평왕의 아들은 초 조왕이다.

세대이름 (시호/별칭)관계비고
1초 공왕-기원전 590–560년 재위
2초 강왕공왕의 맏아들기원전 559–545년 재위
2초 영왕 (위공자)공왕의 둘째 아들기원전 540–529년 재위, 조카 가오 살해 후 찬탈, 동생들의 쿠데타로 축출 후 자살[2]
2자오 (웅비)공왕의 셋째 아들기원전 529년 재위 (약 20일), 쿠데타 참여, 평왕의 계략으로 자살[2]
2자계공자공왕의 넷째 아들쿠데타 참여, 평왕의 계략으로 자살[2]
2초 평왕 (웅기지)공왕의 다섯째 아들기원전 528–516년 재위, 쿠데타 주도 후 왕위 차지[2]
3가오 (웅원)강왕의 아들기원전 544–541년 재위, 숙부 영왕에게 살해됨[2]
3태자 율영왕의 아들쿠데타 중 살해됨[2]
3초 조왕평왕의 아들기원전 515–489년 재위


참조

[1] 서적 Defining Chu: image and reality in ancient Chin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4
[2] 웹사이트 楚世家 (House of Chu) http://www.guoxue.co[...] 2012-02-21
[3] 웹사이트 巢湖历代战争及其影响 http://www.ahage.net[...] Anhui Culture Network 2012-02-24
[4] 웹사이트 湛阪之战遗址 http://www.xinhuaqu.[...] Government of Xinhua District, Pingdingshan 201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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